1897년 초 김보록 로베르 신부가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에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1899년 계산성당을 준공함으로써 대구 및 경상북도 지방의 복음전파를 위한 토대를 구축한다. 당시 계산성당에서 김만득 이냐시오가 1931년 고령군 대가야읍 고아리로 이주하면서 고령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1936년에는 김옥출 도마, 정말순 요안나 부부가 고령으로 이주해오는 등 신도가 늘어나면서 1940년 김만득의 집을 고령공소로 정하게 된다. 고령 지역의 천주교가 새롭게 발전하게 된 것은 1955년 화원본당의 박재수 요한 신부가 고령지역으로 부임하면서부터인데 그는 1958년 그동안 교회 소유의 공소가 없었던 고령지역에 처음으로 공소를 마련하였고 이를 계기로 고령군 곳곳에 공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958년 9월부터 본당 건립 부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여 1964년 12월 2일 대구대교구의 26번째 본당으로 고령성당이 건립되었다. 당시 신도 수는 약 7백명, 관리하는 공소는 13개에 이르렀다. 왜관수도원 알빈슈미트 신부가 설계하였고 앙드레부통신부의 그림이 다수 존재한다. 지금의 성당은 1964년 설립된 성당을 개보수하고 사제관, 수녀원, 유치원 교육관을 재건립하여 2010년 7월 기공식을 갖고 2011년 7월 10일 교구장 조환길 대주교 주례로 봉헌식을 가졌다.
1960년대 초 고령공소에 다니던 김암이 야고보를 비롯한 신도들이 김제생 바오로가 운영하던 고령군 운수면 봉평리 소재 양조장에서 첫 공소예절을 실시한 것이 운수공소의 시작이었다. 이 시기 초대 공소회장으로 1957년경 성주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배제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선임되었다. 1967년 운수면 봉평리 김암이의 가정집으로 공소예절 장소를 옮기고 2대 회장으로 김암이를 선출하였다. 이후 1970년 공소 건립 부지를 매입하고 고 김영옥 요한 본당 신부의 주선으로 건축 자재를 조달받고 공소 신자들의 노력으로 1973년 5월 운수공소를 완공하였다.
건립 후 40년이 흘러 건물 노후화가 심하게 진행되어 일시적인 보수공수공사로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재건립을 결정하고 기금을 모아 공소 옆 부지를 매입하여 교육관 신축도 추진했다. 이후 2011년 3월 27일 정인용 신부 주례로 재건축 축복미사를 봉헌하였다.새로 지어진 운수공소는 1층은 경당, 2층은 공소회관으로 꾸몄으며 앞으로 소그룹 모임을 비롯한 피정 공간으로 쓸 예정이다.
* 현재 운수공소는 고령성당 관할 공소 가운데 유일하게 폐쇄된 곳으로 기본적인 관리만 되고 있다.








<참고자료>
하창환, 고령성당, 디지털고령문화대전,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www.grandculture.net/goryeong/dir/GC02901590
김명숙, 공소를 찾아서-고령성당 운수공소, 월간빛 제326호, 2010년 6월, p.74
https://www.lightzine.co.kr/last.html?p=v&num=1197
가톨릭신문, 운수공소 낙성, 1972.12.10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009070242533
가톨릭신문, 대구대교구 고령본당 운수공소 재건축 축복, 2011.04.03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1103300289844
가톨릭평화신문, 대구대교구 고령본당 운수공소, 2011.03.29
https://news.cpbc.co.kr/article/3717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