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실성당
가실성당이 있는 칠곡군 낙산리는 왜관 낙동강 가에 있는 작은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대구, 안동, 부산 방면으로 오갈 수 있는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1784년 한학을 공부하던 창령 성씨 집안의 성섭이란 학자가 만년에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이 시초라 전한다. 그의 증손자 성순교는 1860년 경신박해 때 상주에서 순교했다.
1886년 한불수호조약 이후 선교의 자유가 허용된 이래 1894년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 하경조(Camillus Palihasse, 河敬朝) 신부가 칠곡 신나무골에 도착하여 신자들의 도움으로 가실에 자리잡고 1895년 6월 11일 칠곡 가실성당이 설립되었다. 조선교구로는 11번째, 대구교구에서는 계산성당 다음으로 설립된 성당이었다. 지금의 성당은 1922~1923년에 지어졌다. 건축양식은 신 고딕 양식을 띈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설계자는 프랑스인 박도행(V. L. Poisnet) 신부다. 그는 1896년부터 1925년까지 30년간 대구 계산성당과 칠곡 왜관성당을 비롯하여 많은 교회건축물을 설계했다.
한국전쟁 당시 낙산마을에서 심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가실성당 건물은 양측이 병원으로 사용했던 관계로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2005년 1월 2일에는 1956년부터 불리워 오던 '낙산성당'을 대치하여 '가실성당' 명칭을 되찾았다. 가실(佳室)은 낙산의 옛 이름이다.
가실성당에 속해 있다가 본당이 된 곳은 모두 4개로, 김천 황금동(1901), 용평(1907), 퇴강(1923), 왜관(1928) 등인데, 이로 인해 관할지역이 좁아지고 신자수가 줄게 되어 드망즈 주교는 1933년 가실성당을 노사제들을 위한 휴양본당으로 설정한다. 이후로도 이농현상이 심해져 신자 수가 급격히 감소하여 1980년대 이후에는 600~700명의 교세만을 유지하게 된다. 1986년 왜관감목대리구가 폐지되어 대구대교구 소속 본당으로 변경되고 1990년 10월 설립100주년을 맞아 기념관을 건립한다.









하산공소
하산공소 관할 구역에 처음으로 신자가 산 것은 하빈면 동곡의 유승렬 바르톨로메오 신부의 선대였으나 일찍 대구로 떠나 신자가 없다가 한국전쟁 후 김 마리아가 서울에서 친정인 이곳으로 내려와 전교를 시작했다. 이 무렵 박형택 베드로의 집안이 모두 세례를 받게 되었고, 박형택 형제를 중심으로 마을 신자들을 모으니 16세대 50여 명이나 되었다. 박씨 형제는 공소를 짓기 위해 자신 소유의 대지 176평을 교회에 헌납하였고, 1955년 5월 19일 건평 22평의 목조 건물을 지어 가실성당 모안세 신부가 축성하였다. 하산공소는 왜관수도원의 알빈슈미트 신부가 설계했다고 알려져 있다.
가실성당 현익현 신부는 하산공소 고해소 한 구석 폐지 더미에서 버리기 직전인 옛 교리서로 사용되었던 그림과 유물을 발견하고, 그림은 가실성당 역사관에, 유물은 관덕정에 전시되도록 하였다. 외국에서 들여온 그림들은 1950~60년대 글을 모르는 예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던 것으로 공소신자들을 위해 사용된 소중한 교리서로써 공소의 역사를 보여주는 가치있는 자료들이다.




<참고자료>
천주교 가실서당>가실성당 안내서
http://www.gasil.kr/01_03_guide.html
가톨릭대사전,가실본당
https://encyclopedia.catholic.or.kr/entry/42
가톨릭대사전,낙산본당
https://encyclopedia.catholic.or.kr/entry/1028
마백락, 장영복, 칠곡 가실성당, 디지털칠곡문화대전, 한국향토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명숙, 공소를 찾아서-가실성당 하산공소, 월간빛 제310호, 2009.2, p.64
https://www.lightzine.co.kr/last.html?p=v&num=947
내부 사진은 다음 링크 참고.
https://ohandrew.tistory.com/7075793
원래 담장이 있었고, 건물색깔도 지금과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https://blog.naver.com/ahentkfkd3/223511786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