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기행/원주교구

영산성당 곤의골공소

photomaker.anon 2024. 8. 27. 00:58

곤의골공소는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 때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온 신자 세 가족이 이곳에 정착해 화전을 일구며 신앙을 지켰던 것이 시작이다. 공소가 위치한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는 골짜기가 여러 곳으로 갈라져 있어 잘 드러나지 않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1866~1871년)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을 정도로 깊은 산골마을이다.
 
이런 지리적인 위치 덕분에 많은 교우들이 모여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는데, 신자들이 처음 살기 시작한 시기에 대해서는 이르게는 1839년 기해박해 때부터라고도 하고 1846년이나 1847년이라고도 한다. 여러 설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앙이 소개된 아주 초기부터 신자들이 제법 큰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것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곳은 원주교구에서는 배론과 풍수원, 서지마을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교우촌이다.
 
1897년 보고서에는 공소 신자가 9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1900년 10월 26일 곤의골공소를 방문한 뮈텔주교의 일기에서 "외인과 떨어져서 계속 깊숙이에 있는 이 공소는 산악 지대에 있다."고 남기기도 했다. 이곳은 곤 곤란(困難)한 일을 겪는 의(義)로운 사람들이 모인 골짜기라는 뜻의 '곤의골'로 불리는데, 행정구역은 고산리이며 '곤이골,' '고니골'이라고도 불린다. 이후 신앙의 자유가 도래하면서 숨어 지내던 교우들이 산 아래 영산마을로 내려와 농사를 짓고 살게 되었고 이들 선조의 후손 200여명이 1990년 지어진 영산본당의 모체가 된다. 지금의 공소건물은 1925년에 신자들이 직접 지었으나, 세월이 흘러 쇠락하자 1987년에 새로 수리하여 현재에 이른다.

 
위 표지판의 기록대로 곤의골공소는 '3-1 정규하 신부길'의 경유지다. 2022년 원주교구는 원주시, 제천시, 횡성군과 협업하여 '님의길'을 개통하였는데, 1길 '최양업 신부길'은 박해시대 신자들이 피난하던 길을 따라 걷는 노선으로 횡성 풍수원성당-구재공소-문막성당-서지마을-귀례공소-화당리 순교자 공원-배론성지로 이어지는 길이다. 2길 '최해성 요한길'은 원주의 성지와 문화재를 거쳐간다. 1839년 9월 6일 순교한 최해성 요한이 강원감영으로 끌려가던 길이다. 술미공소, 대안리공소, 후리사공소는 박해를 피해 산으로 피신한 서지마을 신자들이 내려와 형성한 곳이다. 3길 '정규하 신부길'은 박해 이후 산 위의 등불 역할을 한 교회의 모습을 따라 걷는 노선이다. 정규하 신부길, 르메르 신부길, 지학순 주교길, 선종와 신부길, 성사길 등 5개 구간 72.2킬로미터이다. 
 
정규하 신부는 김대건 신부, 최양업 신부에 이어 세 번째로 사제품을 받은 신부다. 1896년 4월 26일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뮈텔 주교 집전으로 강도영 마르코,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거행된 사제서품식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풍수원성당 초대 주임 르 메르(Le Merre, 1858~1928) 신부에 이어 1896년 8월 17일 2대 본당 신부로 부임한 정규하(아오스딩, 1863~1943) 신부는 부임 이래 1943년 10월 23일 선종할 때까지 47년 동안 풍수원성당에서만 한평생 사목하였다.
 
초창기 풍수원성당은 초가집 여러 채를 이어 사용하다가 신앙 공동체가 커지자 성당건립이 필요하게 되었다. 1907년 정 신부는 고딕양식인 중림동 약현성당 처럼 짓기 위해 명동성당 건축에 참여한 중국인 진 베드로 등의 벽돌공을 불러 뒷산 흙으로 벽돌을 구우며 풍수원성당을 짓게 된다. 화전민이었던 교우들의 노력과 기도로 1910년 우리나라 사제가 설계하고 감독한 최초의 성당이 완성되어 성대한 축복식을 열었다.

풍수원성당 역사관(등록문화재 제163호) 앞의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 흉상. 이 건물은 1912년 건립되어 사제관으로 이용하면서 1층은 산골 아이들을 위한 학교 '삼위학당'으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곤의골공소의 설립과 정규하 신부의 풍수원본당 재임 시기가 겹치기 때문에 정규하 신부와 풍수원본당이 곤의골공소를 관할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횡성지역에는 1830년대에 이미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강원도에서 가장 교세가 성한 지역이었다. 그 후 탄압으로 교우촌이 와해되고 다시 공소가 설정된 1880년 이후에는 이들 공소가 모두 풍수원본당 관할하에 있었다.
 
정규하 신부는 횡성본당을 위해 대지와 건물을 마련해 두었으며, 횡성본당은 1930년 3월 20일 풍수원본당에서 분리 설립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양덕환 안드레아 신부는 그 건물을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횡성본당 설정 당시 관할 지역 중 한 곳이 바로 곤의골공소가 있는 원주군의 고산리, 영산리였다. 당시 횡성본당이 관할하던 공소는 17개소로, 가장 많은 공소를 관할했다. 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영산공소인데, 아마도 곤의골공소가 아닐까 한다. 횡성본당 2대 주임 이보환 요셉신부가 1933년 11월 곤의골공소에 야학을 설치하여 교육을 통한 전교활동을 추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박해시대의 흔적과 닿아 있는 곤의골공소는 최초에는 풍수원본당 관할에서 횡성본당으로, 그리고 영산본당 설정과 함께 영산본당으로 관할이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영산본당은 곤의골공소에서 출발하여 2006년 2월 27일 준본당으로, 2010년 본당으로 승격했다. 하지만 1990년대에 지어진 작은 성당이어서 어려움을 겪다가 2024년 5월 25일 교구장 조규만 주교 주례로 새 성전 봉헌식을 가졌다.  
 
 
 
곤의골공소 가는 길은 차량 교행이 어려울 정도로 좁고, 과연 박해를 피해 이주한 지역이라 인정될 정도로 깊은 산골에 위치해 있다. 지금도 그럴 정도이니 당시에는 오죽했으랴. 공소건물로 올라가는 계단도 불안하게 보일 정도로 낡았다. 아마도 젊은 사람들이 떠나고 남은 신자들 역시 아래마을 영산본당으로 미사를 다니면서 공소의 역할은 유지 정도로 최소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관리된 건물과 종탑, 성모상 등을 보면 공소신자들의 지극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참고자료>
 
기톨릭신문, [매스컴사도직의 선봉 '가톨릭신문'] 원주 곤의골공소, 2020.03.29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003240192180
 
기톨릭평화신문, 논밭 미사 마다 않지만... 어르신들 꿈은 '새 성전 건립,' 2022.07.13
https://news.cpbc.co.kr/article/827776
 
강원도민일보, 님의 길 굽이굽이 마다 평온이 고이는 시간, 2022.11.11
https://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1153842
 
가톨릭신문,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 (5)원주교구 풍수원성당과 역사관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203020101766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 성지안내 > 횡성성당
http://www.clak.or.kr/app_pub/sub/05alarmK/sungji.php?ptype=view&idx=8560&page=1&code=Sungji
 
가톨릭평화신문, [새 성전 봉헌] 원주교구 영산본당, 2024.05.24
https://news.cpbc.co.kr/article/1157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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