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공소는 청도군 운문면 마일리, 정상리와 경상군 용성면 매남리 및 영천군 대창면 용호리와 경계에 있는 구룡산(675m) 산정에 위치한 교우촌이다. 이 깊은 산골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았는 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815년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과 진보의 머루산 교우촌이 파괴됨으로써 신자들이 더 깊은 산속을 찾아 구룡산 바로 아래 교우촌을 이루어 살다가 다시 박해를 만나자 박씨 등이 이곳 구룡산 정상으로 들어와 교우촌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선의산 신자들과 서로 내왕을 하면서 프랑스 신부들의 방문을 받아 성사를 보고 신앙생활을 했다 한다.
과거 구룡공소는 총 세 군데의 공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장 먼저 촌락을 형성한 곳은 큰골공소인데, 촌락의 규모가 커지자 교우들이 분가하여 지금의 구룡으로 올라와 갈대밭을 개간하여 구룡공소를 만들었다. 훗날 구룡공소의 규모도 커지자 부부 한쌍이 매남면 쪽으로 내려가 공소를 형성하였고 그곳이 부붓골공소이다.
구룡산 지역은 박해를 피해 모여든 곳으로 경상북도 남부 지역의 주요 피난처였으며, 인근 대구, 영천, 경주, 밀양 등지에 산재해 있던 신자들과의 교류가 빈번하였고 경상남북도를 잇는 주요 통로였기 때문에 이들 지역의 신앙줄기의 뿌리를 이룬다.
구룡공소는 특히 박해로 인한 순교자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통상 배교자가 있어야 순교자가 생기는데, 배교자가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쉽사리 닿기 힘든 구룡공소의 위치에 더해서 이미 혹독한 박해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모인 신앙공동체였기 때문에 신앙의 깊이와 구성원들의 유대가 남달랐을 것이며 이웃과의 좋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된다.
구룡공소의 또 다른 특징은 신자들의 주된 생계수단이 쌀농사였다는 점이다. 교우들은 천수답을 일구어 살았는데, 이것은 옹기를 구워 팔거나 짚신을 삼아 시장에 내다 판 다른 교우촌과 구별되는 모습이다.
병인박해 후 1882년 김보록(Rovert, 1853~1922) 신부가 이곳에 와서 판공성사를 주었을 때 공소 신자가 60명이었으며, 그 중 53명이 고해성사를 보았고 50명이 영성체를 하였으며 6명의 외교인이 세례를 받았다고 교세 통계표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893년 11월에는 뮈텔(Mutel, 1854~1933) 주교가 언양, 선필, 진목정, 의실공소를 방문한 후 이곳 구룡공소와 매남리의 큰골공소에서 성사를 집행하였다.
이처럼 구룡공소는 교난을 피해 모인 교우촌이지만 신부가 주재하여 사목하였으므로 성당으로 건립되었다. 1921년 12월 20일 드망즈 주교의 사목방문을 기념하여 준본당으로 축성하고 새 성전 건립을 추진하여 20여 년간 전 교우 절미 운동을 전개, 1933년 9월 13일 성전 준공을 이루었다.(아래 현판과 상량문 참고.)
1993년 이문희 대주교가 부활미사 집전 후 성지로의 개발을 지시하여 1995년 공소 복원과 피정의 집을 마련한다. 공소 경당과 사제관은 2015년부터 보수작업을 시작하여 2018년 11월 17일 교구장 조환길 대주교의 축복미사와 함께 구룡공소를 신앙유적지로 선포하였다. 경당은 30명이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작은 한옥으로, 옛 형태를 살려 리모델링했고 낡아서 무너진 옛 사제관은 신축 복원해 유물관으로 꾸몄다. 여기는 관덕정순교기념관에서 보관해오던 공소유물을 상설 전시한다.


















<참고자료>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교구별성지>대구대교구:청도구룡공소
오일영,디지털청도문화대전:구룡공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www.grandculture.net/cheongdo/toc/GC05501486#self
가톨릭신문, 대구대교구 구룡공소 '신앙유적지' 축복식, 2018.11.20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1811200008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