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공소가 위치한 곳은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이다. 낙산리는 낙산1리와 2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통칭 '여진(余津)'이라 했다.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곳 낙동강에서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싸워 대승을 거뒀는데 왕건이 이곳 낙동강 나루터를 “나의 나루” 곧 여진(余津)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1800~1801년 신유박해와 1815년 을해박해 이후로 영남의 교우촌은 48개에 이르렀다. 문경세재와 화령을 거쳐 남하한 신자들이 또 교우촌을 이루어 1827년에는 대구를 포함하여 모두 68개의 교우촌이 영남에 자리잡게 되는데, 이때 상주에서 대구 사이 길목에 터를 잡은 곳이 여진(余津)이다. 여진 교우촌은 해평면 낙산리 사기점에 있었는데, 박해때 신도들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사기를 만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병인박해 이전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살고 있었으며, 공주에서 순교한 김동상이 이곳 출신이다.

병인박해가 끝난 뒤인 1882년경부터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던 김보록 신부가 여진 교우촌을 갔을 당시 교세통계(1882~1883)에 의하면 이곳 여진공소에는 69명의 신자가, 4년 뒤인 1885~1886년에는 96명의 신자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많은 신자들이 이곳을 떠나버려 급격히 신자수가 줄었다. 1893년 11월 뮈텔 주교가 여진공소를 방문했을 때는 신자 가정이 겨우 이 베드로 한 집 뿐이었다. 여기에는 이 베드로의 아들이 한센병을 앓고 있어 아마도 모든 신자들이 군위, 예천 등지로 떠나버려 공소가 폐허가 된 것이라 짐작한다. 거기에 더하여 박해가 끝나 더 나은 곳으로 이주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한국의성지와 사적지에는 1980년에 새로운 공소가 설립되어 20명의 신자들이 살고 있다 하는데, 공소이름이 나와 있지 않아 이 공소가 낙산공소인 지는 확인할 수 없다. 낙산공소에 관한 자료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는데, 가톨릭신문에 따르면 왜관지구에 1963년 한 해 건립한 상당과 공소를 결산하는 기사에서 낙산공소가 언급된다. 그렇다면 낙산공소는 1963년에 설립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또하나 해평성당 홈페이지에 낙산공소의 축복식이 2013년 10월 8일 열렸다는 게시물이 있는데, 이를 종합해보자면 1963년에 세워져서 1980년과 2013년에 개보수를 했거나 신축을 하지 않았나 싶다.
낙산공소의 설립 경과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사실 확인 보다 이 지역이 박해시절 순교자를 배출한 여진교우촌이 있었던 지역임을, 그리고 낙산공소는 당시 여진공소와 인연이 닿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더 큰 소득이었다.
한편 해평성당은 1969년 설립되었고 1973년 10월 18일 새 성전 낙성식과 축성식을 열었는데 당시 주임 신부는 노도주 아르놀드 신부였다. 2019년 본당 설립50주년을 맞았다.


<참고자료>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교구별성지>대구대교구:구미 여진 교우촌
가톨릭신문, 왜관지구서 지난 1년간 천5백평 건립, 1963.11.17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208160130285
해평성당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_c21_/home?grpid=1JVnd
가톨릭신문, 해평성당 낙성, 1973.10.21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103190057885
대구가톨릭평화방송, 대구가톨릭뉴스, 해평성당, 본당 설립 50주년 맞아, 2019.10.11
http://www.dgcpbc.co.kr/program04_04.htm?no=1873&mod=view
주소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587-2 (강동로244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