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기행 7

영양성당 석보공소

석보공소는 1964년 6월 21일 건립되었고 같은 해 8월 15일 공소 축성식을 가졌다. 신자들이 증가함에 따라 1967년 공소를 증축하게 된다. 그러나 건물의 상태로 보아 이후에도 몇 차례 증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더 이상의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공소가 설립되기 전 석보면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8명의 신자들이 있었고 이들이 각자의 집을 옮겨다니면서 기도하고 예절했다는 증언으로 미루어 이것이 석보공소의 시초일 것이다. 공소 설립 이전에는 영양성당이나 입암공소로 미사를 다녔는데, 차도 없고 길도 좋지 못했던 당시 15킬로미터나 떨어진 영양성당까지 7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밥을 싸 들고 밤에 촛불과 호롱불을 들고 길을 떠났다 한다.   영양성당 소속 세 공소 가운데 영양성당과 가장 멀리 ..

성산성당 두촌공소

이제 성산성당 '공소 오형제'의 마지막 두촌공소다. 두촌공소는 두촌면 자은장터길에 있으며, 1959년 설립되었다. 역시 송정, 철정, 역내, 내촌공소와 더불어 2019년 3월에 재건축과 함께 축복식을 가졌다. 외부인의 시선으로 볼 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다섯 개 공소가 비슷해서 개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랄까? 빠듯한 예산 때문에 공동구매(?)를 택해서 생긴 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런 지적은 단지 외부인의 시선일 뿐, 현지에서 계획을 추진하는 분들의 속사정을 모르고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래도 다섯 공소들 간의 차별점이라면 성모동산이다. 두촌공소의 성모동산에는 멋들어지게 휜 소나무가 성모상을 호위하고 있다. 바닥 장식돌도 아기자기 이쁘다. 아마 두촌공소 신자분들의 은밀한(?) 경쟁심의 ..

가평성당 상색공소

​가평군 내에는 화악산, 운악산 같은 크고 작은 산들이 많아 초기 천주교인들에게 적합한 피신처 역할을 하였다. 가평 지역에는 개항 직후인 1885년(고종22)부터 전패공소가 있었으며, 그 후에도 사그막, 백둔리, 상색, 조종안 등에도 공소가 있었다. 이들 초기 천주교 공동체들은 현재 대부부분 폐허가 되어 흔적을 찾기 힘들다. ​상색공소는 가평읍 상색리(上色里)에 있는 공소로, 포회촌공소로도 기술되어 있다. '포회(浦會)'란 말 그대로 물길이 모인다는 뜻으로 생색천이 마을 앞으로 모여 흘러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포회촌공소(이후 '상색공소'로 기술.)는 백둔리, 서파, 조종안 공소와 함께 1909년부터 교세 통계표에 나타나는 공소지만 설립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1909~1910년 교세 통계표에 처음 ..

화천성당, 화천성당 사창리공소

화천성당(華川聖堂) 화천성당은 1965년 3월 15일 춘천 소양로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다. 맥고완 파트리치오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화천지역은 한국전쟁 후 실향민들이 정착하면서 신자 수가 증가하였고, 가톨릭 구제회의 원조로 교세가 점차 확산됨에 따라 1956년 화천읍에 공소가 설립되었다. 1965년 화천본당 설립이 확정되었고 성당이 건립되었다. 2001년에 성당을 신축하였고 화천군 화천읍 상승로 113에 위치해 있다.     사창리공소 강원도 화천군은 화천읍, 간동면, 사내면, 상서면, 하남면 등 5개 읍면으로 이뤄져 있는데, 사창리(史倉里)공소는 사내면에 자리하고 있다. 사내면은 본래 사탄향(史呑鄕)으로 불렸다가 고종 32년(1895) 때 사내면으로 개칭됐다. 1945년 해방과 함께 38..

갈말성당, 갈말성당 문혜공소

이 지역의 신앙 역사는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 되었다. 철원군 갈말읍 지포리 연봉재에 토기 공장을 설립한 한 신자가 다섯 가구의 신도들과 함께 살며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던 것이 시작이었는데, 한국전쟁 후 피난민들이 휴전 후 철원, 김화 지역이 수복됨에 따라 다시 토기 공장을 열고 신앙 공동체를 이어가 지포리 공소가 설립되었다. 당시 신자 수는 40~50명에 달했다. 1957년 철원본당 관할인 지포리공소는 1971년 포천 지역이 춘천교구로 이관됨에 따라 운천본당 관할로 소속이 변경된다.(1957년 지포리공소와 함께 문혜리, 용화동에도 공소가 설립되었다.) 이후 1989년 춘천교구장 박토마스 주교는 지포리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기로 결정하고 1990년 사제관을 완공한다. 갈말성당은 19..

상리성당 대광리공소

대광리공소는 경기도 최북단에 있는 공소로 1957년 6월 4일 철원본당 관할로 공소예절을 드리다가 1963년 행정구역이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변경됨에 따라 동두천본당 관할로 이관되었다.(철원성당60년사) 1967년 가을 동두천본당 제5대 이창숙 그레고리오 신부 시절 공소를 개설하여 윤공희 대주교의 집전으로 낙성식을 갖게 되었다. 동두천본당 제8대 한정관 바오로 신부 시절에는 대광리 교우들의 자체 모금과 본당 지원으로 건물을 보수하고 등기서류를 완비하였다.(동두천성당50년사) 1979년 5월 31일 전곡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하면서 전곡성당 관할이 되었고, 1988년경 공소건물이 낙후되어 신자들이 건물을 신축하려고 모금을 시작하여 1989년 3월 경에 전곡성당 제4대 김정남 안드레아 신부 시절에 기존 시멘트벽돌..

적성성당 장파공소

파주시 장파리 마을은 6.25전쟁으로 잉태된 1950~60년대 한국 사회의 두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인 장소다.  지형이 마루처럼 길다고 해서 장마루라고도 불리는 장파리는 전쟁 직후 임진강 건너 DMZ(비무장지대) 인근 JSA(공동경비구역)에 주둔하며 파괴된 교량, 건물을 복구하던 미군 28연대(공병대) 병사들이 부대 복귀하거나 휴가를 위해 머물면서 마을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인근 파평면 지장리과 적서면 고란포 마을 주민들이 모여 세를 형성한 장파리 마을은 미군 주둔에 따라 상주 인구 5천명, 유동 인구도 3만명이 넘쳐날 정도로 활기가 돌았다고 한다. 당시 미군 상대로 운영되던 '라스트챈스 클럽,' '천주교 장파공소,' 리비 중사가 건설한 '리비교' 이발소 등이 여전히 존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