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지역은 1870년대 초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신자들의 교우촌이 형성되면서 여러 개의 공소가 설립되었다. 1893년 석촌동에 살던 김태호 프란치스코가 용평동으로 이주하여 본인 집에 공소를 마련하면서 용평공소가 설립되었다. 그는 경상도의 포교를 담당하고 있던 김보록(로베르) 신부에게 성사를 받아 왔는데, 1898년 경에는 가실본당 3대 주임 옥유아(알폰소) 신부가 자주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화산공소라는 명칭은 후에 쓰게 된 것으로, 처음에는 화산면 용평리에 위치했기에 용평공소라 불렸다.
1907년 5월 30일 용평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본당 신부로 이곳 출신 순교자 김종륜 루카의 손자이며 김종황의 둘째 아들인 김승연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부임하였다. 1900년 9월 사제 서품되어 전북 정읍 본당 신부였던 김 신부는 부임하자마자 사제관과 성당 건축공사를 시작하여 1912년 1월 6일 대구교구장 안세화(드망즈)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주교는 3일간 머물며 견진성사를 주기도 하였는데, 당시 영천 지방에는 16개의 공소가 있었고 신자 수는 840여 명이었다.
승격 당시 용평본당은 영남지방의 일곱번째 본당으로, 당시 소속 공소로는 구룡, 황강, 괴연, 질구지, 지일, 하양, 가상, 신녕, 지천, 선관, 과전공소 등을 관할하였고 화산면, 신녕면, 임고면, 군위군 고로면과 산성면 일대로 교세를 확장하여 영천 지역 천주교 신앙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용평본당 3대 주임 델랑드(L. Deslandes) 신부는 영천 외각에 있는 용평본당의 위치를 감안하여 영천읍에 본당을 설립할 계획을 갖고 과전공소를 설립하였고 과전공소가 1936년 영천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용평본당은 영천본당 관할 용평공소로 격하되었다. 그 이전인 1915년 6월부터 1919년까지 대구본당 소속 공소로 격하되었고, 같은해 11월 재차 본당으로 승격되는 복잡한 역사를 갖고 있다.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1893년 : 용평공소 설립
1907년 5월 3일 : 용평본당으로 승격
1915년 6월~1919년 : 대구본당 소속 공소로 격하
1919년 11월 : 용평본당으로 재승격
1937년 : 영천본당 설립으로 영천본당 관할 공소로 격하
1966년 : 신녕본당 설립으로 신녕본당 관할 공소
화산 공소는 일제강점기인 1929년 11월 6일 화산면 용평리에 세워진 서양식 목조건물인 화산 공립 소학교를개축하여 설립되었다. 후에 화산 공립 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되고 1967년 화산면 유성리로 이전하게 되는데, 이때 이 건물이 용평본당에 불하되어 교사 내부의 복도 등을 개축해 1968년 화산 공소로 사용되었다. 1989년에 신축 성전을 건립했지만 목조 건물은 역사적 자산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
화산공소는 2007년 100주년을 맞아 8월 15일 조환길 주교 주례로 기념미사를 봉헌하였다.(용평본당 승격 년도인 1907년을 기준)






<참고자료>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대구대교구:영천 화산(용평)공소
정경재,디지털영천문화대전>성당,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yeongcheon.grandculture.net/yeongcheon/toc/GC05101816
가톨릭신문, [사진으로 보는 한국교회 근세사] 28. 영남의 옛 본당들 1. 영천 용평, 1983.05.29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1105270127727
기톨릭신문, 대구 신령본당 관할 화산공소 기공, 1989.08.27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009210245757
김명숙, 본당 소공동체를 찾아서-신녕성당 화산공소, 월간<빛> 290호, 2007.06, p.90
https://www.lightzine.co.kr/last.html?p=v&num=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