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천공소가 있는 자천리(慈川里)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앞내를 자을천(慈乙川)이라 하여 ‘잘내’ 또는 ‘자을천’이라 부르다가, 언제부터인가 ‘을(乙)’ 자를 빼고 자천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다. 자천공소는 현재 영천성당 관할 내 4개 공소(고경, 괴연, 북안, 자천)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데, 2026년이면 백주년을 맞는 유서깊은 공소다.
자천공소는 화남면 금호동에 있었던 질구지공소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용평성당의 2대 주임 유흥모 안드레아 신부때 대구의 열심 교우 노경옥 가밀로 형제가 화북면 자천동으로 이주하여 물래방앗간을 운영하면서 마을 주민들에게 열성으로 전교를 시작하면서부터라 한다. 그의 열정적인 전교에 힘입어 1926년 용평본당 2대 주임 유흥모 신부는 당시 쇠락해가던 질구지공소를 폐지하고 자천으로 공소를 옮기게 되었는데 지금의 공소 위치와 좀 떨어진 곳에 초가집 두 채를 매입하여 공소로 사용하다가 1940년 서병훈의 기와집을 사재와 헌금, 기존 공소건물 매각기금, 서병훈의 희사금 등으로 매입하여 지금의 자리로 옯겼다. 당시 성당의 종을 기증한 정 마리아는 자신의 밭을 따로 기증할 만큼 공소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신자수가 증가하자 본당으로 승격되어 1942년 5월 최재선 요한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러나 3개월 후 최 신부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1943년 2월 석방되어 대구 계산성당 보좌신부로 전임되고 자천본당은 다시 공소로 격하되었다.
최 신부 구속 이후 일본 경찰은 자천공소에 대해 심한 탄압을 가해왔고 공소를 폐쇄하는가 하면 공소의 종을 헌납하라는 강압과 위협을 계속했지만 신자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종을 수호하며 주말마다 경찰의 집회 허가를 받아가면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공소 예절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안타깝게도 종과 종대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공소의 성모상은 1981년 전국평신도협의회 교육분과위원장 이동일 바오로가 공소 전교를 자청하여 공소에 약 2년간 머물면서 자신의 회갑연 비용을 줄여 봉헌한 것으로 1982년 성모 승천 대축일에 제막실 축성행사를 했다. 1985년 5월 15, 16일 이 성모상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는 일간지의 보도로 인해 신자들이 몰려드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1985년 공소건물이 낡고 협소해져 42평의 콘크리트 건물을 신축하여 영천본당 김상규 필립보 신부 주례로 본당 및 공소 신자들 2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축성식을 가졌다. 이어 1986년 3월 29일 예수부활 대축일 전야 미사에는 이문희 대주교 주례로 미사를 봉헌했다. 아울러 2005년에는 50석 규모의 공소 식당을 완공하여 본당과 공소 신자는 물론 외부 피정객을 위한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2020년 현재 주일미사 참례자가 65명 정도 되고 레지오 4개 쁘레시디움과 반모임 3팀이 활동하고 있다. 미사는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30분과 주일 오전 10시 30분에 봉헌되는데 근처 산자연학교장 이영동 치릴로 신부가 집전한다.


아무래도 역사가 오랜 공소다 보니 지금의 단정한 모습 이면에 숨겨진 풍파도 많았을 것이다. 공소 마당에는 일제강점기인 1941년 10월에 제2대 대구교구장(당시는 대구대목구. 조선대목구는 한일병합 이듬해인 1914년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나뉘게 되었다. ) 문제만(文濟萬, Musset, 1876~1957) 주교가 개조를 위해 방문했고, 한국전쟁 휴전협정 이전인 1953년 3월에는 최덕홍 요한(1902~1954) 주교가 폭파된 공소 복구를 위해 이영우 신부를 초청하여 다녀갔음을 알리는 비석이 있다. 추측컨데 자천공소는 주교가 개조를 위해 방문할 정도로 주목받는 공소였음을 알 수 있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폭파되는 아픔도 겪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026년이면 백주년을 맞는 자천공소는 지금도 평소 50~60명의 신자들이 주일미사에 참례한다. 농촌의 본당과 공소 모두 신자 수가 줄어드는 위기 속에서도 자천공소는 조금씩 신자 수를 늘리며 활성화되고 있는데, 그 비결로 '샛별밴드'가 있다고 한다. 자천공소 신자와 지역주민과의 화합을 위해 결성된 밴드는 지금도 꾸준히 활동하면서 100주년 기념성당 건립도 계획하고 있다.
<참고자료>
김명숙, 공소를 찾아서-영천성당 자천공소, 월간<빛> 제330호, 2010년 10월, p.74
https://www.lightzine.co.kr/last.html?p=v&num=1255
박지현, 만나고 싶었습니다-자천공소 서종대 회장과 이상옥 총무, 월간<빛> 제449호, 2020년 9월, p.58
https://www.lightzine.co.kr/last.html?p=v&num=4084
가톨릭신문, 서울 예수발현소동이어 영천서 "성모상에서 눈물 흘렸다"소란, 1985.05.26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1504060124373
가톨릭신문, 영천 자천공소, '평균70세' 밴드로 활성화 도모, 2023.12.03
https://www.catholictimes.org/392411
문제만(뭇세) 신부와 일본인 주교의 대구교구장 취임에 관해서는 다음 글 참조.
가톨릭신문, [초기 한국교회의 발자취]25 여명팔십년, 1973.12.02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102050048984
최덕홍 신부에 관해서는 다음 글 참조.
김정숙,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최덕홍 요한(1902~1954)
https://blog.naver.com/antoine-therese/223237892409
자천공소 인근 자천교회는 대한제국 말 개신교가 전래된 이래 초기 한국교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교회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역사적 의미를 지닌 교회가 같은 지역에 오랜 기간 공존하고 있음이 흥미롭다.
손산문, 자천리에 터 잡은 자천교회, 그 100년간의 기록,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yeongcheon.grandculture.net/yeongcheon/toc/GC05100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