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기행/인천교구

하점성당 교동공소

photomaker.anon 2024. 3. 9. 06:47

 

내게 교동도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해병대 입대한 친구가 훈련을 마치고 교동도에 배치를 받았다고 연락이 왔다. 요즘이야 강화와 교동도를 잇는 다리도 놓였고 대중교통이 워낙 잘 발달돼서 당일로도 충분히 갔다올 수 있지만 당시(1980년 정도로 기억)에는 당일치기는 커녕, 어지간히 큰 마음을 먹지 않으면 가기 힘든 곳이었다. 신촌에서 강화행 버스를 타고 강화읍내로, 거기서 또 버스를 갈아 타고 선착장(아마도 창후리가 아니었을까?)으로 이동하여 교동도로 들어가는 배를 타야 했으니 말이다.

 

벼르고 벼르다 큰 맘먹고 출발했다. 신촌에서 강화가는 버스를 타고, 거기서 선착장까지 가서 교동도행 배표를 끊었다. 표를 살 때 신분증을 다 걷은 다음 배를 탄 후 일일이 돌아다니며 얼굴을 확인하고 신분증을 돌려줬고, 내려서도 금속탐지기로 내몸을 흝고 통과했던 기억이 난다.

 

면회를 왔다니 시장 안에 있는 다방으로 가란다. 면회를 왔으면 부대로 가야 하는데 어째서 다방으로 보내는 지 알 수 없지만 말을 들을 수 밖에. 선착장에서 시장까지는 거리가 상당해서 걸어갈 수도 없고 해서 어렵게 군대 차량을 얻어 타고 다방에 도착했다. 해병 한 명이 무전기를 올려놓고 앉아 있길래 면회를 신청하고 기다리니 인솔하는 고참 병사와 함께 후줄근한 작업복을 입은 친구가 나타났다. 

 

고참이 편하게 이야기 하라고 잠시 자리를 피해 주자마자 갑자기 친구의 눈에서 눈물이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난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람의 눈에서 그렇게 많은 양의 눈물이 단시간에 흘러 나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구질 구질한 작업복을 적시며 소나기처럼 떨어지던 그 눈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허름한 여관방에서 하룻밤를 보내고 떠나던 날, 또다시 울 것 같은 친구의 얼굴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누군가에는 낯선 이름인 교동도가 내게는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장소인 이유다.

 

여기까지가 나와 교동도의 인연이다.

 

다리가 놓인 후 몇 차례교동도를 방문했다. 무슨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이후로 교동도가 핫해졌다는 말을 듣고 주변에서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선 거다. 그에게 교동도는 낯선 섬이겠지만, 내게는 평생잊지 못할 장소였기에 주저없이 따라 나섰다. 스무살 내 추억을 위해.

 

내가 갔던 시장 이름이 '대룡시장'이란다. 당시 나는 시장 이름도 몰랐다. 관심도 없고 들었더라도 잊어버렸겠지만. 아무튼 옛날 시골 시장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소위 '레트로 감성' 때문에 사람들이 몰린다고 한다. 내가 갔을 때는 이미 관광지화가 진행되어 있었고 갈 때 마다 점점 심해졌다. 심지어 시장이 입소문을 타자 섬을 떠났던 사람들은 물론 외지 사람들 까지 몰려와 교동도와는 아무 상관없는 흔하디 흔한 관광객을 겨냥한 주전부리 가게나 카페만 늘어가는 모습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염려스럽다. 만들어진 레트로는 짝통이다. 뭐, 그거라도 좋아할 사람은 있겠지만 유통기한이 길지는 않을 것 같다.

 

 

 

 

분단 당시 38선 이남이던 황해도 연백군은 6.25 전쟁 전까지 교동도와 같은 생활권이었다. 그래서 전쟁 중 폭격이 심해지자 연백군 주민들은 잠시 머물 요량으로 교동도로 피란했다.하지만 정전협정 후 피란민들은 졸지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면서 적잖은 사람들이 교동도를 새 터전으로 삼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품은 채 살아가게 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연백군과 개성 등지에서 피난온 교우들이 함께 모여 공소예절을 하면서 신앙공동체를 이뤘는데, 이 공동체가 1958년 1월 강화본당(초대주임 장금구 신부)이 설립된 후 교동공소로 결정됐다. 이후 내가본당(주임 김준태 신부)을 거쳐 현재 하점본당(주임 주현철 신부) 관할 공소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교동공소는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방인이 로베르토(Robert R Pellini) 신부가 은퇴 후 2005년부터 미사를 집전하고 공소를 관리하고 있다. 규모는 어지간한 본당을 방불케 하고 관리 상태 역시 구석구석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얼마나 애정을 갖고 관리하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 방인이 신부는 2024년 4월 30일 교동공소에서 마지막 미사를 집전한 후 5월 5일 하점성당에서 송별미사를 봉헌했다. 16일 "감사합니다. 기쁘게 사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64년의 선교여행을 마치고 본국인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메리놀회 요양원에서 여생을 보낼 예정이라 한다.

 

 

<참고자료>

 

가톨릭평화신문, 북녘땅 접경 교동도 이산가족들 기다림, 2009.12.08

https://news.cpbc.co.kr/article/318779

 

가톨릭신문, 평화의 섬 교동공소, 2017.04.02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278208

 

가톨릭평화신문, 교동도에 부는 평화의 바람, 언제쯤 북녘땅에 전해질까, 2023.12.20

https://news.cpbc.co.kr/article/1140941?division=NAVER

 

가톨릭평화신문, 메리놀회 방인이 신부, 64년 한국 선교 마치고 귀향, 2024.05.22

https://news.cpbc.co.kr/article/1157113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대룡안길45번길11

'공소기행 > 인천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흥성당 선재공소  (0) 2024.03.09
내가성당 삼산공소  (0) 2024.03.09
마니산성당 흥왕리공소  (0) 2024.03.05
강화성당 냉정리공소 / 선원(준) 본당  (0) 2024.03.04
온수성당 고능리공소  (0) 2024.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