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기행/인천교구 12

하점성당 창후리공소

창후리공소는 1960년 5월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 150번지에 15평 규모의 한옥으로 설립되었고 강화본당 관할이었다. 지금의 공소는 1984년 1월 24일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 집전으로 신축성당 축성식을 가졌다. 당시 62세대 1백65명의 신자가 있었다 한다. 이후 하점본당으로 관할이 이전된다.  창후리 공소는 현재 폐쇄되어 더 이상 운영하지 않는데, 정확한 폐쇄 시점은 확인할 수 없었다. 추측컨데 2014년 6월 개통된 교동대교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창후리 선착장은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수상 교통로였는데, 다리가 개통됨에 따라 지역이 쇠퇴했고 그것이 공소 폐쇄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더군다나 2017년 6월 석모대교까지 개통됨으로써 창후리 지역은 한층 더 애매한..

대부성당 선감공소

선감공소가 위치한 대부도는 시화방조제와 탄도방조제를 통해 육지와 연결되어 행정구역 상으로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가 되었다. 선감공소는 1961년 탑동본당 관할로 설립되었고 1965년 송림동당으로, 1992년 10월에는 대부본당으로 관할이 이전된다. 공소에는 매주 오전 6시 신자 20~30명이 모여 주일미사를 드린다고 한다.(2019년 기준) 소박하지만 단아하게 방문객을 맞아주는 자그마한 성모상을 지나면 공소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크고 잘 지어진 공소건물을 만난다. 지금의 선감공소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1990년에 선감공소로 들어와 1994년 공소를 새로 짓고 1996년부터 2004년 까지 공소회장을 맡은 서창의 안나(2009년 당시 82세)회장님이다. 성전 아래는 신자들이 몰래 지은 ..

영흥성당 선재공소

선재도(仙才島)는 대부도와 영흥도 사이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조선후기까지 소우도라고 불리다가 1871년 전후로 선재도로 개칭되었다. 1914년 영흥도와 함께 부천군에, 1973년에는 옹진군으로 편입되었다가 1995년에 인천광역시에 통합된다. 지금은 간척 사업과 교량을 건설하여 배를 타고 접하는 섬의 분위기는 없어졌지만 선감도, 대부도, 선재도, 영흥도는 배로만 접근 가능했던 곳이었다. 그 중 선재공소가 있는 선재도는 규모도 작다 보니 섬 중에서도 낙도로 취급되던 작은 섬이었다. 선재공소는 1958년 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되지만 궁핍한 삶을 타개하고자 뭍으로 이사가는 신자들이 늘어나게 됨에 따라 1965년 폐쇄된다. 당시 양성경 야고보 초대 공소회장은 자신의 집에서 신자 3명과 공소예절을 하면서 신앙..

내가성당 삼산공소

삼산공소가 있는 석모도는 수도권 사람들에게 보문사가 있어 많이 알려져 있었으나 배를 타고 가야 했기 때문에 쉽게 가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이었다. 더구나 강화까지 대중교통도 그리 좋지 못했고, 강화에서 선창장 까지 가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오래전 작심하고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딱 한 번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자가용이 보편화되고 도로망과 대중교통이 하루가 다르게 발달함에 따라 강화도 정도는 하루 코스로 갔다 올 정도에 이르렀고, 특히 2017년 6월 28일에 강화도와 석모도를 잇는 다리가 개통된 덕분에 마음만 먹으면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강화도는 비교적 자주 가는 곳인데도 갈 때 마다 새 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닐 정도다. ​이..

하점성당 교동공소

내게 교동도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해병대 입대한 친구가 훈련을 마치고 교동도에 배치를 받았다고 연락이 왔다. 요즘이야 강화와 교동도를 잇는 다리도 놓였고 대중교통이 워낙 잘 발달돼서 당일로도 충분히 갔다올 수 있지만 당시(1980년 정도로 기억)에는 당일치기는 커녕, 어지간히 큰 마음을 먹지 않으면 가기 힘든 곳이었다. 신촌에서 강화행 버스를 타고 강화읍내로, 거기서 또 버스를 갈아 타고 선착장(아마도 창후리가 아니었을까?)으로 이동하여 교동도로 들어가는 배를 타야 했으니 말이다.  벼르고 벼르다 큰 맘먹고 출발했다. 신촌에서 강화가는 버스를 타고, 거기서 선착장까지 가서 교동도행 배표를 끊었다. 표를 살 때 신분증을 다 걷은 다음 배를 탄 후 일일이 돌아다니며 얼굴을 확인하고 신분증을 돌려줬고, ..

마니산성당 흥왕리공소

흥왕리공소는 원래 강화성당 소속 공소로 1965년 6월 5일 설립되었고 1995년 8월 28일 온수리공소가 강화본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승격됨에 따라 온수성당으로 관할이 변경된다. 당시 온수성당 관할 지역에 초지공소, 오두리공소, 고능리공소, 상방리공소, 흥왕리공소가 속해 있었지만 상방리공소가 2004년 1월 26일 마니산(준)본당으로 승격됨에 따라 흥왕리공소는 마니산성당 소속 공소가 된다. <p data-ke-s..

강화성당 냉정리공소 / 선원(준) 본당

냉정리공소를 네비에서 검색하면 "철종외가길44-6"으로 나와 있어 잠시 갸우뚱해진다. 우연히 자리잡은 곳이 거기인지, 아니면 '강화도령' 철종과 철종의 외가가 공소와 관계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언군(恩彦君. 1754.5.29~1801.6.30)은 영조의 손자로,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이며 조선 25대 국왕인 철종의 할아버지이다. 그는 홍국영의 역모에 연루되어 죽을 뻔했으나 정조의 배려로 강화도에 유배된다. 그러나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자 1801년 신유사옥때 처 송씨(송 마리아. 철종의 할머니)와 며느리 신씨(신 마리아)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로부터 영세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도주하다 붙잡혀 송씨 신씨와 함께 강화도에서 사사된다. 이 둘은 왕족의 첫 순교자라는 점에서 의..

온수성당 고능리공소

1959년 나근길(이레네오)이 교리실을 마련한 뒤 예비 신자들을 모아 가르치면서 이곳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1966년에는 부지를 매입하여 공소 건물을 짓고 나길모 주교 집전으로 축복식을 거행하였고, 초대 공소 회장에 나양한(요한)을 선임하였다. 그 후 강화 본당 주임 장희영(張喜榮, 시몬) 신부가 1981년에 공소 주변의 대지 610㎡를 매입해 주었고, 같은 해 3월에는 신심 단체인 성모회(회장 : 김명자 베로니카)가 발족되었으며, 7월 1일에는 공소 총무로 고춘순(필립보)이 선임되었다. 나근희(마르코) 제5대 공소 회장 때인 1997년 11월 25일에는 ‘고능리 공소’ 건물이 완공되어 나길모 주교 집전으로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1999년 2월부터는 온수 본당 제2대 주임 베가라(A. Verga..

온수성당 오두리공소

강화도 교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메리놀(Marynoll. '마리아의 언덕'이란 뜻이다.) 외방선교회를 살펴봐야 한다. 1961년 6월 6일 인천교구가 설정되고 초대 교구장으로 윌리엄 맥노튼(한국명 나길모) 주교가 임명됐다. 교구 설정 당시 16명의 성직자가 모두 메리놀 외방선교회 출신이었다. 강화도에는 토마스 맥키 신부가 1959년 제2대 강화본당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메리놀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진출했다. 이후 패트릭 파터슨, 마이클 브란스필드, 존 둔니간, 조셉 룃트게일, 로버트 펠리니 신부가 강화도에서 사목했다. 메리놀 외방선교회 신부들은 엄격하고 보수적이었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달리 개방적이고 진취적이어서 지역민들과 빨리 친숙해졌고 선교 활동도 그만큼 활발했다. 특히 1963년 제3대 강화본당..

온수성당 초지공소

60여 년 이어온 신앙의 못자리 ​초지진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인천교구 온수본당 초지공소가 있다. 6ㆍ25 전쟁 휴전 후 초대 강화본당 주임인 장금구 신부가 강화도 선교를 자원했다. “강화도 온수리란 곳에 차를 내려 신자들이 있는가 찾아보다가 멀지 않은 곳에 옹기 굽는 집이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그곳에 가 보았다. 신자 170여 명이 집단 거주하고 있었으나 다른 곳엔 교우가 없고 강화읍 대산리에 몇 집이 있을 뿐이었다. 인구 10만이 넘는 강화군에 성공회당이 3개요, 개신교 예배당이 무려 60여 개가 있으나 성당은 공소만 둘, 그것도 인천본당에 속해 있어서 1년에 한두 번 신부가 다녀갈 뿐이었다.”(「강화성당 이야기」 54쪽, 장금구 신부 회고록 중에서) 장 신부의 말처럼 1928년 충남 서산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