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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동성당 남적공소

서문동성당은 1936년 상주본당에 부임한 김문옥 초대 주임 신부가 건립하였다. 김 신부는 공평성당 주임 신부로 재임하면서 상주본당(서문동성당) 부지를 확보하고 기초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왜관대리구 시절인 1955년 7월부터 1956년 7월까지 함창본당 공소로 격하되었다가 다시 승격하였고, 1957년 4월 2일 구 성당을 헐어내고 신축공사를 시작하여 1957년 10월 13일 현 건물을 지어 축성식을 하였다. 1969년 5월 29일 안동교구가 설립되며 안동교구 소속이 되었으며 초대 교구장 두봉 주교는 계림동성당을 분가(1990)하였고 개운동성당(2007.7.15)이 신설되고 함창본당 소속 양정공소가 공검본당으로 승격하여 서문동본당 소속 은척공소(2010.9.10)가 공검본당 소속으로 바뀌게 되어 오늘에 이..

옥산성당 왕실공소

왕실공소의 소재지는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효곡1리386번지다. 공소의 이름은 대부분 지명을 따라 붙이는 게 일반적인데, 이런 의미에서 효곡리(孝谷里) 소재 왕실공소는 뭔가 이질적이다. 더군다나 '왕실'하면 왕가(王家)가 연상되기 때문에 유래가 더 궁금해진다. 설마 왕실과 연관된 뭔가가 있어서일까? 상주시 읍면동 홈페이지에서는 효곡리 마을을 소개하면서 왕실공소가 아니라 효곡공소로 소개하고 있다. 아무튼 왕실공소라는 이름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언제부터 그렇게 불렀는 지는 좀 더 알아봐야 할 것같다. 워낙 왕실공소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을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추측을 해보자면 집 실(室)자를 따서 마을이름 뒤에 붙이기도 하는데(예컨데 '무실마을' 따위), 아마 효곡마을, 혹은 왕..

옥산성당 청리공소

옥산성당은 1958년 설립된 옥산공소에서 시작된다. 1960년 10월 옥산공소 건물을 준공하였고, 이 당시에는 서문동본당 소속 공소였다. 1994년 12월 21일 옥산본당이 설정되면서 청리, 왕실, 외남공소를 편입하게 되고 1995년 2월 12일 초대 본당 신부 허보록(필립보) 신부가 부임하여 옥산본당 승격 기념미사가 열렸다. 현재 외남공소는 개운동성당 관할로 이전되었고, 옥산본당은 청리, 왕실 두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옥산본당은 곳곳에 벽체가 갈라지고 지붕에 물이 새는 등 복합적인 노후현상을 보여 재정비의 뜻을 모아 2016년 9월부터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시행하고 입구를 증축하여 2017년 3월 19일 교구장 권혁주 주교 주례로 새단장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청리공소는 1954년 설립되었다..

계림동성당 길마을(길말)공소

본래 상주군 중동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월상리와 월하리를 병합하여 '금당리(金堂里)'가 되었다. 공소의 명칭은 '길말공소'였는데, 길말 > 질마을 > 길마을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점촌동역사100년'에 1941년 11월 14일 퇴강본당 관할인 길말(상주 중동)공소를 예천본당 관할로 이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안동교구사 자료 제6집 75쪽에서 재인용) 길마을공소에서 정리한 연대기에 따르면 공소의 설립은 1923년으로, 이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처음 들어온 것은 1906년 이전으로 추정한다. 첫 신자 송필규는 사벌면 퇴강리의 물미본당 이종필 마지아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송씨 집성촌인 길말의 집안 사람들에게 신앙을 권하여 교우촌을 만들고 초대 공소회장에 임명되었다. 1927년 11월 ..

화령성당 모서공소

모서공소는 남서쪽으로 모동면과 충북 영동군 황간면을 경계로 백화산이 있는 모서면 삼포리에 있다. 해발 270미터 산간지대여서 주야간 일교차가 심해 포도가 특산품이며 신자들 대부분이 포도농사를 짓고 있다.  모서공소는 1968년 화령성당 제3대 주임 송요셉(한국명 송만협, Joseph Zenglein, 1911~1991 독일출신) 신부때 건립하였다. 독일의 은인인 요셉 그레벨 형제의 후원금 100마르크로 대지를 구입하고 교육관을 건립하였다. 송요셉 신부의 열정과 독일 은인의 후원, 그리고 신자들의 노력봉사로 공소 건물이 완공된 것이다. 이 공소 역시 알빈 신부가 설계하고 내부에는 앙드레 부통신부의 벽화가 있다고 한다. 잠겨 있어 확인은 못했으나 아래 레지오 마리애 링크를 통해 벽화를 볼 수 있다. 한때 신..

화령성당 화동공소

화동공소는 1965년 설립되었다. 이 공소는 왜관 베네딕토 수도원 설계실에서 100개 이상의 한국 교회 및 공소 건축을 설계한 독일출신 알빈 슈미트(Alwin Schmid, 1904~1978) 신부의 작품이다. 1936년 사제서품 1년 후 한국인이 많이 살았던 만주 연길교구에 파견되어 용정본당을 맏는 등 사목활동을 하였으나 해방 후 공산군에 체포되어 남평과 하얼빈에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1949년 독일로 추방되었다. 독일로 돌아간 그는 한국 파견 동료 신부들의 요청으로 김천의 평화동성당, 문경 점촌동성당과 가은성당, 부산 분도병원을 설계한 것을 계기로 1961년 한국으로 돌아와 왜관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본격적인 건축설계와 미술작업을 하게 된다. 한국 성당건축의 근대화와 토착화에 기여한 그는 75세 때인 1..

화령성당 모동공소

을해박해(1815년)와 정해박해(1827년)는 경상도 북부지역 교우촌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청송 노래산 등 산속에 숨어 사는 교인들의 재산을 노린 전재수의 밀고로 포졸들이 예수부활대축일에 들이닥쳐 박해가 시작되었다. 을해박해로 경상도 천주교인 100~300명이 체포되었고, 경주 옥사에서 7명, 청송 옥사 7명, 대구 감영에서 33명이 순교했다. 을해박해 후 청송 노래산에 살던 신자들이 신나무골(칠곡), 한티(칠곡), 질구리(영천), 상주 앵무동 언양 등 경상도 각지로 흩어져 신앙이 널리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정해박해(1827년)는 전라도 곡성에서 시작되어 전라도 일대가 박해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전주옥에서 심문하는 과정에서 상주에 살던 3도(三道) 회장이었던 신태보의 이름이 나오자 그..

화령성당 하송공소

하송(下松)공소는 병인박해 후 순교자 후손들에 의해 이루어진 신앙공동체로 안동교구의 사적지이다. 하송공소는 1910년 세워졌다. 이곳에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가 된 사람은 전주 사람 박명학(베드로)의 부친이 이곳에 와 옹기굴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는데, 공소로 설립될 당시 마을 사람 100여 명이 모두 신자였다고 한다. 화서면 소재지와 외서면 예의리, 화북면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다.(상주시 읍면동) 아마 세거리공소라는 이름의 유래가 여기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하송공소는 청개공소와 송내공소가 합쳐져서 이루어졌다. 원래 이 지역에서는 청개공소가 가장 먼저 생겼고 후에 송내공소가 생겨났으며 이를 합쳐서 '세거리'공소로 불려오다가 1969년 베네딕토 수도회 송만협 신부가 새로 공소를 신축하..

화령성당 화북공소

화령성당 지역의 신앙 전래는 1828년 순교자 신태보(베드로)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병인박해가 끝나고 상주본당이 생겨 신앙활동을 하고 있던 때 화령초등학교 근처 기와집 한 채를 공소건물로 사용하다가 왜관 분도회가 이 지역 사목을 담당하게 되자 1962년 4월 화령본당이 설립되고 지인수(Ernst Siebertz) 신부가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여 사목하였고(1962~1964년) 하송, 입석, 화북, 화동, 모서, 모동, 수봉골소를 지어 214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 후 13명의 사제를 거치며 한 때 2천여 명의 신자가 있었으나 극심한 이농현상으로 현재 900여 명의 신자들이 본당과 5개 공소(화동, 모서, 모동, 하송, 화북)에 살고 있다. 화북공소는1960년 설립되어 1985년에 문을 닫..

개운동성당 외남공소

외남공소는 1962년 7월 완공된 공소로 당시 상주에서 하나 뿐인 상주본당(현 서문동 본당) 소속이었다. 1958년 경제적으로 빈곤할 때 성당에서 밀가루를 준다는 소문 때문에 사람들어 서문동성당을 나갔는데, 신자 4,5명이 외남면에서는 상주성당이 멀어 본당 주임이었던 경 엘리기우스(성 베네딕토회) 신부에게 공소 신설을 요청했고 경 신부가 침례장소를 마련하여 허락한다. 지사1리 최인배씨의 농사 창고를 빌려 공소예절을 시작하여 1959년 8월 15일 첫 영세자 이상육 벨라도가 탄생한다. 1962년 3월 외남공소 신축공사를 하여 8월에 경 엘리기우스 신부가 축성하였다. 당시 공소를 흙벽돌로 지었는데 주변에서 모래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모래를 구하려면 5Km 떨어진 수상리에 가야 했는데 당시에는 길이 없..